최고의 지성과 영성의 소유자이자 기독교 신학의 틀을 형성한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의 신국론을 접하게 되신 당신의 선택을 칭찬합니다. 이글을 접하게 된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도전이며 이 정리된 내용을 모두다 읽으신다면, 크나큰 산을 하나 정복한 것이 될 것입니다. 신학의 기본 틀을 형성한 어거스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도나 목회자들이 이 큰 산을 오를 생각조차 못하는 안따가운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심갖고 도전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 박수를 치며, 정리된 것을 하나하나 읽어보시고 꼭 큰 산을 정복하시기를 바라봅니다.
1. 1권 개요
세상의 재난, 특히 고트족에 의한 로마의 약탈을 그리스도교와, 제신숭배 금지에 책임을 돌리는 이교도들을 저자는 반박하고 있다. 그는 인생의 생사화복은 항상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다같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끝으로, 그는 여인들이 군인들에게 폭행당한 것이 그리스도교인들 때문이라는 그들의 후안무치함을 통박(痛駁)하고 있다.
2. 친애하는 마르켈리누스에게
(참고: 마르켈리누스는 가톨릭과 도나투스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해결하고자 411년 여름에 카르타고에서 소집된 공의회를 주재하도록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하여 파견된 인물로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끼던 제자였다. 그는 논쟁에서 가톨릭의 승리를 인정하고 도나투스파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려다 그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의 반열에 드는 영광을 받았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룰 주제는 하나님의 영화로운 도성에 대한 변증이라네. 하나님의 도성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 믿지 않는 세대 속에서 낯선 이들처럼 살아가는 곳이자 영원히 완성될 도성이지. 비록 지금은 공정한 심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지만,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도성이 최종적 승리와 완전한 평화 속에 완성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네.
하나님의 도성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가 맞서야 할 적들이 세상의 도성에 나타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믿지 않는 것이라는 잘못만 고치면, 하나님의 도성의 착한 시민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도성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도성이 베푼 은혜를 배반하기도 하지. 만일 그들이 로마가 침략당할 때,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는 교회 건물에 숨어서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다면, 오늘처럼 하나님의 도성을 적대시하여 비웃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지. 그 위기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은혜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이제는 아예 로마의 재난과 위기에 대해 기독교를 비난하기까지 하는군.
최근 로마에서 일어난 침략, 살해, 약탈, 그리고 방화는 전쟁의 습관이요, 다만 전쟁의 잔인함이 줄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지. 교회에 숨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바로 그것이지.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호받은 것이요, 교회가 베푼 은혜라고 해야 마땅하건만, 이것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교회 비난까지 하는 자들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드는군.
하나님의 채찍은 착한 자들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인내는 나쁜 자들을 회개하게 하지. 하나님의 자비는 은혜를 베풀어 착한 자들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나쁜 자들을 벌하시고 그들을 바로잡아 주지. 사실 일이 잘되는 것이나 어려운 것이나 간에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하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같은 고통을 당해도, 충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관점이 다르지. 착한 자 중 로마가 침략당할 때 재산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지. 심지어 기독교인도 고문을 당했고 재산을 빼앗겼지만, 적들에게 마음의 선은 빼앗기지 않았지. 적에게 살해당한 사람 중에는 기독교인도 많았고, 심지어 시체가 묻히지 못해 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했지. 적의 포로가 된 기독교인도 많았고. 이 모든 것을 두고 로마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조차도 지켜 주지 않았다고 비웃고 있다네. 기독교가 로마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재난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그들처럼 비열하지 않았지. 오히려 그들은 하늘의 도성을 기다리는 자들로서. 자신을 낯선 이들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네. 그들을 비난하거나 로마의 어려운 일을 그들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지.
로마가 침략당할 때, 적에게 학대당하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이 자살했지. 만일, 자살이 옳은 행위였다면 신앙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자살하라고 권유해야겠지만, 신앙의 조상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자살은 결코 옳지 않지. 로마 사람 중에는 전쟁 중에 성폭력 당한 여인들을 두고 말하기를, 자신도 모르게 성욕에 휩쓸릴 수 있으므로 누군가 자신의 몸에 이런 죄를 짓기 전에 자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 잠든 육체에 일어나는 일은 본인 탓으로 돌릴 수 없듯, 강제로 일어난 일은 더더욱 탓할 것이 없다네.
억지스럽게도, 로마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를 비난하고 로마의 쇠퇴를 기독교 탓으로 돌리려 열심이 되어 있는 것 같군.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정직함에 흠을 내고 싶어서 답답해하고 있지. 그렇다면, 그 위기의 때에 그들이 그토록 섬기는 로마의 신들은 도대체 어디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군. 로마가 엄청난 재난에 무너져 내릴 때, 로마의 신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인지 반문하고 싶다는 뜻이지.
로마 시민들이여, 그대들은 왜 기독교를 비난하는가? 따지고 보면, 쾌락에 빠져서 온갖 탐욕스러운 문화를 즐겼던 자들은 바로 당신들 아닌가? 평화와 풍요를 추구하되 도덕도 절제도 없이 무분별하게 방종했던 자들이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당신들은 마땅히 탐욕과 사치라는 두 가지 악덕을 경계해야 했소. 그대들은 축제 공연에 온갖 추한 일들을 공공연히 무대에 올릴 정도로 정신적 전염병에 걸린 자들이오. 그대들은 로마가 침공을 당한 그 순간마저도 카르타고까지 도망가서 그곳에서 날마다 극장에 모여 배우들을 칭찬하는데 열광했던 어리석은 백성이지 않은가? 저 위대한 스키피오가 염려했던 것이 바로 정신의 부패와 전염성이며 도덕성의 상실이었다. 자신의 악행을 탓하기는커녕, 기독교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데 혈안이 된 로마 시민들이여, 여러분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하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교회에 피신하여 적의 손길을 피할 수 있도록 보살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오.
하나님 도성의 시민들이여,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기초로 삼아 교회의 적들에게 응수하기 바라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논거를 동원하시오. 다만 적들 가운데 장차 하나님의 도성에 속할 우리의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 상대에게 응수할 때, 하나님의 도성을 공격하는 반대자라 해도 그들이 회심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필요도 있지. 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이 세상을 순례하는 동안 우리와 함께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 역시 분명하지.
나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통해 두 도성의 처음과 발전에 관하여, 그리고 종말을 다루고자 하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도성이 다른 도성과 대조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탁월한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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