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저자는 먼저 로마제국의 번영(이미 앞에서 거짓 신들에게 돌릴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을 운명에 돌리는 자들을 논박하기 위해 운명론을 다룬다. 그 후 저자는 하나님의 예지(미리아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는 모순이 없다고 증명한다. 그리고 나서 고대 로마인들의 관습을 말하고 난 후, 로마가 그 영토를 넓히게 된 것은 비록 로마가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로마인 자신들의 덕과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인 황제의 참된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
2. 마르켈리누스에게
로마제국이 번성했던 것은 우연도 숙명도 아니라네. 무릇 모든 왕국은 하나님의 섭리로 건설되지.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점성술을 말하기도 하지. 하지만, 인간사의 모든 것이 별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을 귀담아들어서는 안 된다네. 생각해 보게. 쌍둥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 간격으로 태어나지만, 임신은 동일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둘의 인생은 같거나 유사해야 하지만, 오히려 서로 다른 일들을 만나게 되지.
히포크라테스(고대 그리스의 의사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가 쌍둥이를 건강상 유사체질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점성가들은 사람의 잉태와 출생 시점에 있던 별자리에 영향이 있다고 주장하곤 하지. 하지만, 실제로 쌍둥이에게도 차이가 나는 것을 잊지 말게.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지만 그들의 인생은 너무도 차이가 나고 부모의 사랑에서도 차이가 나지 않았는가? 내가 보기에, 점성술은 사악한 술수에 불과하네. 같은 순간에 임신된 쌍둥이가 각각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내를 맞이하는 데도 날짜를 택하고 밭에 파종하는 날도 택일하는 한심한 일들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별자리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연쇄라는 관점에서 운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 만약 사실들의 순서가 확실하다면 원인들의 순서도 확실해야 하지. 원인이 없다면 아무것도 발생할 수 없고, 모든 것이 그 순서대로 발생한다면 결국 발생하는 모든 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 그렇게 되면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유의지도 무의미해지고 말지.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지를 둘 다 인정한다네. 모든 것의 원인을 예지하시는 하나님은 그 원인들 속에 자유의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자유의지가 행위의 원인일 수 있다는 것까지 예지하신다는 뜻이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자유의지를 주신 분이시지만, 악한 의지까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된 선택을 한 것이지. 말하자면, 죄를 짓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당사자가 왜곡된 선택을 한 것이지. 더구나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처벌 없이 용서하지도 않지만 자비 없어 버려두지도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네.
앞에서, 우리는 로마의 출범과 번영에 신들이 아무것도 해준 일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네. 또한 이것을 운명이라고 설명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네. 올바를 설명을 위해서라도 역사의 기록을 보게나. 초창기 로마인들은 영광스러운 명예에 집착했고 그것을 위해 죽는 일을 명예롭게 생각했지. 바로 이것, 명예에 대한 탐욕과 영광에 대한 욕망이 참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낸 셈이지. 고대 로마는 시민들의 탁월한 덕성으로 모든 것을 성취했지만 그 후 사치와 태만으로 도시는 부패하고 말았지. 영웅들은 제국의 안녕을 일신의 안위보다 앞세웠지만, 그것 자체로 덕성은 아니었지. 어디까지나 명예욕을 위해 돈에 대한 탐욕을 비롯한 악덕들을 스스로 제어했던 것이니까. 더구나 로마인들은 지상의 도성에 속했고, 그들의 목적 자체가 지상의 도성이었으며, 하늘이 아닌 땅에 속한 왕권에 목적을 두고 있었던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이 공동의 소유인 공화국을 위해 개인의 소유를 소홀히 했고 물욕에 저항했으며 자유로운 결단으로 조국에 헌신했고 정욕에 물들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로마에 비해 칭송받을 대목이지. 하지만, 이것 자체가 완전한 덕성이라고는 할 수 없네. 다만, 로마의 번영을 위한 노력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보편적인 보상이었다고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성도들이 받을 보상은 차원이 다르지. 그들에게 로마인들의 받은 보편적 보상을 보여주신 것은 영원한 도성의 시민들에게 지상에서 순례하는 동안 절제 있는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배려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지상의 도성을 위해 사는 자들도 보상을 받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늘의 도성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는 도구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전에 로마가 시민들에게 곡물을 나누어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전쟁의 노략물이 아니라 공화국의 공무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사람의 원조를 받아 시행한 일이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일세. 어쨌든, 로마인들은 덕성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의 번영이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지. 로마인들이 지상의 도시를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더욱 절제 있고 바른 삶을 결심해야 하겠지.
브루투스(로마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로마 공화제의 전설적 창시자)는 지상의 도성을 위해 아들을 죽였다는데, 저 영원한 하늘의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유쾌한 향락을 극복하는 것쯤 감당할 수 있지 않겠니? 가령,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고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재산을 분배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우리와 자손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지상의 도성에서 누리는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지. 일찍이 순교자들은 하늘의 도성을 위해 목숨까지도 희생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 어떤 보상에도 속지 않고 영원한 도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자랑할 필요도 없지. 지상의 도성, 로마인들도 명예를 위해 일하는데, 우리가 하늘의 도성을 위해 무언가 했다고 자랑하거나 자기 의를 말해서는 곤란하겠지.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네. 명예욕과 지배욕은 큰 차이가 있지. 명예로운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두 부류가 있지. 정당한 방법으로 공을 세우거나 선한 사람인 척하면서 음모와 술수를 부리는 있다네. 그중에서 명예욕보다 지배욕이 강하면 잔학하고 방탕한 정도가 짐승보다 더한 경우가 많지. 우리가 보기에 참된 예배의 덕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참된 덕성도 가질 수 없다네. 또한 인간을 위한 명예욕 또한 진정한 덕성일 수 없지. 영원한 도성의 시민이 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나마 인간을 위한 명예욕이라도 가지는 것이 아예 그런 것 자체가 없거나 사악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겠지. 하지만, 참된 경건이 없는 덕성은 아무리 칭송을 받아도 하늘의 도성에 속한 성도들이 지닌 초보적인 덕성에도 비길 수 없다네. 참된 하나님의 은총에 희망을 두는 자들이라야 참된 덕을 가진 자들일 수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성도들이 바로 그렇다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선의 목적을 덕 그 자체에 두곤 하지. 그러나 인간의 덕성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면에서는 칭송에 얽매여 있다네. 만일 자기 안에 덕스러운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흡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지 칭송을 들음으로써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지.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모든 권능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하지. 하늘의 도성에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만 행복을 주시지만, 지상의 도성에서는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 모두에게 각자의 정도에 따라 보상을 주시지. 하나님은 아시리아인들에게도 페르시아인들에게도 왕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지. 하나님은 마리우스에게도 권력을 주었고 네로에게도 그렇게 하셨지. 다만 각자의 행위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지. 이 역시 하나님의 통치에 해당한다고 하겠네. 전쟁 기간 역시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정의로운 심판이 되거나 인류에 대한 자비가 되거나 하는 판단에 따라, 더 빨리 끝나는 전쟁도 있고 더 늦게 끝나는 전쟁도 있지.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지. 기독교 통치자가 다스리는 시대에 전쟁이 길어지면 기독교를 탓하는 사람들이 있다네. 기독교가 아니라 로마의 신들을 섬겼더라면 전쟁이 더 빨리 끝났을 것이라고 시비도 걸지. 그러나 전쟁은 기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항상 있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일세. 나는 그들이 기독교를 무작정 비난만 해댈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하리라보네. 더구나 현세의 긴박한 사정을 이유로 참된 종교인 기독교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참된 종교를 섬기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네.
일찍이 로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황제들도 있었지. 나는 그들이 세상의 명예욕에 따르지 않고 겸손과 자비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황제들이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자들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군.
하나님은 정령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위대한 보상을 주셨지. 하지만 콘스탄티누스(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언한 로마황제)와 같은 행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기독교인이 되기보다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일세. 그런가 하면, 테오도시우스(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든 로마황제)는 지상에서 군림하는 것보다 자신이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더 기뻐했지. 그의 겸손을 보신 하나님은 위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본다면, 로마제국의 역사는 우연도 숙명도 아닌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해야겠지. 심지어 제국의 영토 확장 역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과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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