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글락의 다윗
시글락의 다윗과 그와 함께했던 공동체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째서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가복음 2:15-17
다윗은 20대 시기를 현상금이 붙은 지명 수배자로서 광야에서 보냈다. 다윗이 대략 10년 정도 광야에서 도망자 신세로 살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다윗은 나이는 많지는 않았지만 광야 생활에 관한 한 노련한 대가였다. 그는 쫓겨 다니며 광야라는 광야는 다 다녀 보았다. 십 광야(삼상23:15, 26:2), 마온 광야(삼상 23:25), 엔게디 광야(삼상 24:1), 바란 광야(삼상 25:1)등, 이름은 다르지만 이 광야들이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네겝-남쪽이라고 불리는 협곡과 대머리수리가 있는 거대한 남쪽 황야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 광야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직접 살아보면 그들 모두는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은 어려움이란 없다. 고통 역시 매번 다른 법이다. 시험, 유혹도 다 다르기 마련이다. 다윗은 안과 밖 모두에서 광야의 지형을 지도로 그려냈다. 다윗은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광야 지도 제작자다.
광야는 지리적인 실재인 동시에 영적인 은유다. 모세에게는 시내 광야가 있었다. 예수님께는 유대 광야가 있었다. 다윗에게는 그가 10년이나 살았던 여러 광야들이 있었다.
다윗의 광야 생활 중에 일어났던,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너무나 뜻밖인 ‘최고’는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교회와 같은 공동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다룰 ‘최고’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것이다. 아둘람과 그 다음의 시글락이 바로 그것이다.
2. 아둘람 굴
사울을 피해 홀로 도망치던 다윗은 사울의 적이었던 블레셋 족속 가드의 통치자 아기스 왕에게 망명했으나, 이는 허탕이었다.(삼상21:10-15). 다윗은 아기스 역시 사울을 대적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미친 척해서 겨우 죽음을 면한 그는 재빨리 아둘람 굴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있지는 않았다. 오래지 않아 400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삼상22:1-2)
이것이 다윗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는 첫 번째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예기치 못했던 모습이었다. 우선 “형들과 온 집안”(삼상22:1)이 그곳에 왔다고 했는데, 아마 그들은 사울의 적대감이 다윗 집안 전체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리 했던 것 같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비록 다윗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함께 당하는 고통을 통해 그들 사이에 전에 없던 형제애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들이 오자 다윗은 곧 부모님을 모압 땅으로 모셔 왔고, 광야 시절 내내 거기서 그분들을 돌보아 드렸다.(삼상 22:3-4)
아마도 시편 133편은 다윗과 형들이 뜻이 하나가 되었던 이 시절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일!
머리 위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께서 여기에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본문은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들을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삼상22:2)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다윗의 회중에 대한 사회학적 단평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들, 거절당하고 실패하고 탈락한 자들이었다. 다윗은 광야에서의 10년을 바로 이런 이들과 함께 보냈다. 역대상 12장에 정리된 개괄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사기 충천한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커다란 맥락(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본다면, 우리는 도덕적, 사회적 하류층이었던 그 집단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태아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Hebrew)라는 단어가 원래는 인종학적 명칭이 아니라 중동 문화권의 사회적 주변 계층, 즉 비천한 떠돌이들과 추방당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하나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문화적, 정치적 엘리트들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비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 사역을 펼쳐 나가셨다.
이 점을 숙고해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 안에 숱한 혼란과 불만족, 당혹스러움과 물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영성 생활에서 가장 많은 실망과 불만족이 생겨나는 영역은 바로 이 공동체의 경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들어가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사람들이 서로 남의 일을 가지고 수군대는 모습을 발견한다. 교회를 나와 버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교회는 싫어요.”
아둘람 굴의 다윗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사기꾼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꿔버릴 참인가?
이 문제에서 바울은 훨씬 더 현실적이다. (고전1:26-31)
26.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여러분 가운데 과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습니까? 부자가 있습니까?
2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29.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0.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는 일을 그리스도께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바르고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를 자유롭게 살게 해주시려고 친히 그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31. 그러므로 성경에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광야 영성은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사귀려고 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일을 포함한다. 이들은 대개 근사한 사람들이 못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다윗이 그랬다. 예수님도 그랬다. 바울도 그랬다.
3. 가드의 아기스
이렇게 다윗의 공동체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바로 600명까지 불어난 그 공동체가 가드의 아기스 왕과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삼상27:2) 전에 홀로 망명했던 다윗을 죽이려 했던 바로 그 왕, 더더구나 블레셋 왕과 말이다.
다윗은 광야생활 마지막 16개월 동안 블레셋 지역에서 그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살았다. 사울의 살인 기도에서 도무지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다윗은 마침내 자신과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이었던 블레셋과 동맹을 맺기에 이른 것이다. 다윗은 적국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그들에게 철저히 사기까지 친다. 그는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 행세를 하면서 매일같이 이스라엘 마을을 노략질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오랜 적인 남방 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있었다. 그는 그 물건들을 아기스 왕과 나누었는데, 왕은 그것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약탈품인 줄로만 안다. 아기스 왕은 그토록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군사 동료를 얻게 된 것을 기뻐한다. 너무 기쁜 나무지 다윗에게 시글락이라는 도시를 선물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이 본문을 그 맥락 가운데서 읽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또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뚜렷이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깨닫는 바는, 사실 이러한 일들 하나하나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월터 부르그만이 말하듯이, “지금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밑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주제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지극히 의도성이 강한 작품을 대하고 있다. 다윗이 어디에 있든 여호와는 그와 함께 하신다….” 이 본문 배후에 숨어 있는 주제는 다윗의 저급한 도덕성이나 영리한 천재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것은 다윗이 처한 상황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이 언약을 배신하지 않도록 그를 지키신다. 영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가? 이다.
다윗의 아기스 왕과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문화에 굴복해 살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성경에는 “그들 중에 있지 말고 나오라. 구별된 백성이 되어라.”는 명령이 여러 번 되풀이된다.. 성경은 다양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세상 문화의 흐름에 저항하며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너무도 거대한 문화의 압력에 압도되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섭리하시며 비밀리에 일하시며, 우리가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해 주신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나는 가드의 아기스의 우산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스스로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친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솔직히 말해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공공연히 경멸하는 사업체와 거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조차 혐오하는 배우자와 살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압제받는 자들을 외면하는 경제 체제 속에 어쩔 수 없이 얽혀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것이다.
4. 시글락
다윗은 아기스를 위해 일하면서, 자신과 군대가 머물 수 있는 도시 하나를 달라고 요청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시글락은 다윗의 기지가 되었고, 가족과 병사들을 위한 그의 ‘교회’가 되었다.
나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바로 시글락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지하게 살려는 이들이 흔히 자신의 기대와 전혀 맞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 속에 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처럼 나의 기대에 전혀 맞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교회일 수 있다. 우리는 나 같은 예외도 있는데 왜 하나님은 좀 괜찮은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켜서 교인을 만드시지 않느냐고 불평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 속에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나 도덕 주의자를 만나 한 대 얻어맞고 쭉 뻗는다. 혹은 세속주의자를 만나 유혹을 받고 속아 넘어간다. 우리는 시글락에 살고 있는 것이다.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런 것들과 멀리 떨어져 홀로, 종교 사업가들과 위선자들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영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을 정직하게 읽는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곧 알게 된다. 우리는 결코 홀로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다윗이 가드의 아기스를 섬기고 있고, 시글락에서 도덕적, 사회적 부랑자 모임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전부일 때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그곳에서 변화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드시고 성령님이 창조하신 삶들 곧 희생적인 겸손, 믿을 수 없는 용기, 영웅적 미덕, 거룩한 찬양, 고난 중의 기쁨, 끊임없는 기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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