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소를 찾은 두 인물 다윗과 도엑
사무엘상 21-22장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런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말하여 두는 것은,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한 말을 도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16:1-4)
다윗은 달려간다. 짐을 챙길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아무런 계획도 정하지 못한 채 자신을 좇는 사울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쳐 달려가고 있다. 그는 제사장의 땅 놉 땅으로 달려갔다.
2. 아히멜렉
성소는 거룩한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제사장 – 아히멜렉 – 은 그곳을 거룩하게 지키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숨을 헐떡거리며 놉의 성소에 나타나자, 아히멜렉은 조금 당황하고 동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히멜렉이 떨면서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삼상21:1)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사울로부터 쫓기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제사장을 안심시킨다. 그리고서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한다.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왕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면 젊은이들 몇 명이 이리로 올 터인데, 우리에겐 음식이 필요합니다. 먹을 것 좀 있습니까? 빵 다섯 덩어리나 뭐든 있는 것을 좀 주십시오.”
이 부분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 결코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다. 다윗의 삶은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삶이다. 우리는 도덕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적 삶에 대한 감각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통해 다윗 이야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자주 또 너무도 흉하게 우리의 영성생활을 타락시키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나의 나됨이 별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하고 부르기도 하고 성소에 들어가 기도도 드리지만, 거기에 조금씩 가식이 깃들기 시작하고 우리의 말과 행동에 은근히 부정직함이 깔리기 시작한다. 종교 행위를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응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심산이다.
다윗은 빵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지만 사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줄 빵이 없었다.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빵만 있었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금지된 빵이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종교 규정을 접어두고 다윗에게 그 빵을 주었다. 아히멜렉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소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여 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율법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따른 아히멜렉을 넌지시 칭찬하셨다.(마12:1-5)
다윗은 빵을 먹은 후 제사장에게 무기를 내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무기가 있었다. 바로 골리앗의 칼이었다. 자신이 몇 년 전 엘라 골짜기 전투의 전리품으로 가져온 그 칼 말이다. 그 칼은 기념물이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그 칼을 내어 주었다.
다윗은 그 칼을 지니고 성소를 떠났다.
성소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목소리를 낮추고 교양 있게 행동하는 경건한 장소인가? 묵상하며 사색하고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울 등을 기억하는 곳인가? 그렇다. 하지만 성소는 또한 긴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도움을 얻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여행을 위한 양식을 주고 싸움을 위한 칼을 주는 곳이다. 다윗은 먹지 못한 빈 배와 무기 없는 맨손으로 성소에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서 나올 때는 다윗은 배는 든든했고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놉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추어 성소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과 관계가 깊어지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곳은 또한 다윗처럼 빵과 칼을 얻는 곳, 든든한 양식과 전투용 무기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빵과 칼, 이 두 단어 모두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빵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이다. 궁지에 몰려 양식도, 무기도 없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우리는 성소를 찾는다. 거룩한 장소를 찾는다. 그러면 거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 거룩 속에서 생명력과, 삶을 깊이 있게 하는 힘을 발견한다. 이러한 성소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근본적인 영성이다. 신앙을 대적하는 이 위험한 세상 속에서 성소 없이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급이 필요하다. 거룩한 삶을 위해 거룩한 장소들이 필요하다.
3. 도엑
다윗이 놉의 성소에 방문했을 때 그곳을 방문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그는 바로 도엑이다. 도엑은 에돔 사람으로 사울의 신하(삼상21:7)로 부르고 있다. 그는 그 날 어떤 종교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성소에 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 앞에서 하여야 할 일이 있어서 거기 머물러 있었다.”(삼상21:7) 그러나 도엑은 사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그냥 종교인이었을 뿐이다.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아마 어떤 정치적 이득이나 정당화를 위해 그 종교적 장소에 왔을 것이다.
철두철미한 기회주의자였던 도엑은 이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한다. 그러자 사울은 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그는 놉에 있던 아히멜렉과 모든 보조 제사장들(85명이 있었다.)을 심문했고, 그들을 자신에 대항해 다윗과 함께 음모를 꾸민 자들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신관과 종교관을 볼 수 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제사장의 임무는 도망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왕을 비호하는 것이었다. 성소는 배고프고 쫓기는 사람들이 도움을 얻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념하고 국가의 전통을 보존하는 길가의 사당에 불과했다. 종교의 보전에 최고의 충성을 바치지 않는 제사장들은 국가에 위험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은 제사장들 모두를 죽이라 명령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사울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들은 아무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명령이 결코 하나님의 명령을 침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사울은 도엑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도엑은 무방비 상태의 제사장 85명 뿐 만 아니라 그 마을 사람 전체 – 여자들, 아이들, 가축들까지 학살했다.(삼상22:18-19)
종교 개혁자 칼뱅은 도엑을 ‘최고로 악한’이라고 불렀다. 다윗의 시편 52편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 시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로 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와 있다고 알렸을 무렵에”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성소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부르심, 기도의 처소, 구원의 증거를 다시 기억해 낸다.
그러나 성소에선 또한 끔찍한 일도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가 멸시하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구분 짖기 위해 종교 의식을 이용할 수도 있다.
거룩한 곳에 들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때마다, 우리는 더 나아져서 나올 수도 있고 더 나빠져서 나올 수도 있다.
내가 교회에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
우리는 다윗처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과 너무도 거룩한 성찬은 사실 우리에게 너무도 필요한 일상적 양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성소를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