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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과 신학

시글락의 위기를 극복한 다윗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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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솔 시내의 다윗

브솔 시내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이다. 브솔 시내의 다윗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접촉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 재연되고 있다.

 

2. 파괴당한 시글락

다윗과 600명의 부하는 가족과 아이들을 무방비 상태의 시글락에 놓아두고, 군사 작전을 위해 가드의 아기스 왕과 함께 먼 곳으로 떠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이스라엘과 오랜 숙적 관계에 있던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다.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다윗과 부하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연기와 파편뿐이었다. 그들 600명은 비탄에 휩싸였고, 그 비탄은 다윗을 향한 거대한 분노로 돌변했다. 저들은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 시글락에 닥친 재앙은 우선 사람들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재앙가운데 최선을 끄집어냈다. 비탄과 분노와 쓰라림이 휘몰아치고 살인 폭풍우가 몰려오는 와중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을 만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삼상30:6) 다윗은 기도했다. 다윗은 경배했다. 다윗은 그의 목사 아비아달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다윗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과 방향을 발견했다. 외부 세계가 온통 허물어져 내리는 와중에 그는 내면세계로 되돌아가 자신의 중심적 정체성을 다시 세웠고 자신의 기초를 회복했다. 놀랍게도 재앙은 16개월 동안 아기스에게 얽매여 있던 다윗을 즉각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귀 기울여 들었고 용기 있게 순종했다. 다윗과 아비아달은 침묵과 상담과 기도의 장소로 들어갔고 거기서 하나의 계획을 듣고 나왔다. 다윗은 빼앗기 여자와 아이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다.

 

3. 병든 이집트인

다윗의 600명 부대는 아말렉 약탈자들을 추적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태였다. 먼 전선에 나가 블레셋 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폐허가 된 시글락의 모습에 사기가 한없이 꺾여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다윗에게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출발했다. 그리고 브솔 시내에 도착했다. 그러자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명의 부하는 더 이상 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탈진했다. 그래서 그들은 브솔 시내에 그대로 남겨졌다.

 

다윗과 400명은 그들을 남겨두고 시내를 건너서 황량한 사막지역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아무리 찾아도 아말렉 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쯤 죽은 채 버려진 병든 이집트인을 발견했다.

 

그 병든 이집트 소년은 복수의 길을 가고 있는 지친 이스라엘 군인들이 자신을 자비롭게 돌보아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는 그를 보자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어떤 아말렉 왕의 종이었는데 병이 들어 성가신 존재가 되자 사막에서 그냥 죽도록 버려진 것이었다. 그 가련한 소년은 3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마시지도 못했다. 다윗은 그를 보살펴 주었고 음식을 먹여 주었으며 목숨을 구해주었다.

 

다윗은 광야에서 버림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또 어려움 당할 때 관대한 도움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보살핌을 받고 살아난 이집트 소년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에 그들에게 아말렉 인들의 거처를 알려 주었다. 병든 이집트 노예를 귀찮다고 버렸을 때, 그들은 승리의 축제를 벌일 장소로 가던 길이었다.

 

다윗이 도착해보니 잔치는 최고조에 달했다. 아말렉 인들은 먹고 마시며 춤추며 야단법석이었다. 약탈한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그들은 안심하여 보초도 세워두지 않았다. 흥청망청 마시며 놀고 있는 그들을 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다윗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아말렉 인들이 다른 마을에서 약탈해 온 많은 양 떼와 소떼도 덤으로 얻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물건을 되찾은 다윗과 부하들ㄹ은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고 비탄에 젖고 분노에 찼던 사람들이 이제 기쁨에 겨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다윗을 높이며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윗의 공로로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 슬랄 다비드, 제 슬랄 다비드”(다윗의 전리품이다. 삼상30:20)

 

4. 브솔 시내

브솔 시내

 

다윗의 승리가 이 이야기의 절정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브솔 시내에서 일어났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400명은 200명의 동료가 남아 있던 브솔 시내에 도착했다. 그런데 승리하고 돌아온 400명 중에는 인색한 이들이 있었다. 저들 중에는 나약한 동료들과 전리품을 나누는 것에 불끈 반발했다. 바로 그때 다윗이 나섰다. 그의 개입은 바로 이 이야기의 절정이다. 다윗은 브솔 시내에서 터진 문제에 개입했고 이 개입은 그야말로 복음 그 자체였다. 그날 브솔 시내에서 다윗이 내린 판결은 이것이었다. 도중 하차해서 뒤에 남아 시내에 있던 자들이나 목숨을 걸고 싸움터로 나간 400이나, 모두 동등하며 그러므로 모든 것을 동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삼상3):23-25)

 

성경은 공정한 분배를 요구했던 주동자들을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식적이고 당연한 정의를 요구했던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심한 욕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이들은 내세울만한 것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었으나 아무 공로 없이 비참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삶으로 인도된 사람들이었다. 아말렉 추격 사건도 그렇다. 처음에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후에 이렇게 가족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다윗이 아비아달과 함께 기도했고 그들이 한 이집트인에게 동정을 베풀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였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물건을 공정하게 나누자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그들을 놀랍도록 관대한 은혜로 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서로를 놀랍도록 관대한 은혜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념이었다.

 

5. 돌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다.

흔히 다윗은 열정의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자기 앞에 무엇이 있든 간에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져서 거기에 몰입했다. 노래든 전투든 기도든 혹은 사랑이든 하나님이든 말이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긴 하지만, 다윗은 자비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열정은 공동체적 열정, 즉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정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정열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다.

 

돌봄이야 말라 가장 위대한 일이다. 폰 휴겔은 말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타인을 돌보아 주라고 가르친다.” 한 세대 후에 시인 오든은 세상을 향해 최후통첩을 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자아 성취에 대한 이야기와 책이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아 성취에 도달한 개인은 가장 적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기 계발에 가히 광적으로 집착했지만 결국은 일종의 종교가 된 이기적 자기 중심주의가 유행했을 뿐이다. 경제적 번영, 정치적 해방, 종교의 자유는 결국 비만과 불안과 저급함을 꽃피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세상 사람들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형편없는 것보다 자신의 별장이 형편없는 것을 더 고통스럽게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흩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다윗과 같은 구체적인 자비의 실천을 통해 모두가 서로 완전히 결합되어 그 어떤 전문가라도 우리를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말이다.

 

브솔 시내의 다윗은 예수님을 얘기한다.. 지쳤느냐? 힘이 없느냐? 종교에 대해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라. 그러면 생명을 회복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진정한 쉼을 보여 주겠다. 나와 함께 행하고 나와 함께 일하라. 내가 어떻게 행하고 일하는지를 보고 배우라. 자연스러운 은혜의 리듬을 배우라. 나는 너희에게 무겁고 억지스러운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나와 교제하라. 그러면 너희는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삶을 배울 것이다.”(마11:28-30,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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