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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과 신학

엔게디 광야의 다윗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3.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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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엔게디 광야

다윗은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에서 생활했다. 그곳은 다윗에게 없어서는 안 될 피난처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주변에 간신배들로 가득 찬 사울에게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이 광야의 생활은 나중 예수님의 광야생활을 예표하기도 했다. 엔게디 광야는 다윗에게 훈련의 시간이었다. 

 

 

관련성경 : 사무엘상 23-24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마가복음1:12-13)

 

엔게디는 사해 옆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로서, 이스라엘의 남동쪽 외딴곳에 있는 소금물 호수다.

2. 없어서는 안 될 광야

광야는 무언가 거대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북미 대륙 대부분의 지역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야였다. 그러나 약탈, 개발, 상업화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있다. 이곳은 광산업자들, 목축업자와 농장주들로 인해 점점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고속도로와 송유관과 쇼핑몰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광야를 보존하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왜냐하면 이용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인 산과 들, 강과 사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광야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할 임무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으며 그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다. 그저 깨어 있고 그저 살아 있으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사람들은 광야에 있을 때, 자신이 자신다워지고 자연스러워진 것을 느낀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광야 생활에 익숙해질 수 없긴 하지만 사람들은 매우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광야는 또한 겁나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이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과 긴장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도시로 나가서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문명화된 곳에 살고 있더라도 광야로 내던져지는 때가 있다. 이는 지리적인 광야가 아니라 상황적인 광야라고 부르는 광야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얻었고 직업을 얻었고 집을 꾸몄고 좋은 차를 장만했고 생활에 질서를 잡아 주는 스케줄을 따라 움직였으며 중요한 책임을 맡아 자신을 과시했고,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 내면에, 혹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광야에 들어간다. 물론 광야가 상황적으로 끔찍하고 겁나며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곳이 아름다운 장소라는 사실도 믿는다. 광야에 처할 때, 물론 우리는 겁을 먹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하는 곳이지만 사람마다 맞이하는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와 삶의 특별한 소중함에 직면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세 가지 광야 이야기

광야 이야기는 유혹과 시험의 이야기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이며 유혹의 장소이다. 광야는 야생의 땅이다. 길들여지거나 경작된 것은 없고 일상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삶은 생존 그 자체이다.

 

다윗의 엔게디 광야 이야기는 다른 두 가지의 광야 이야기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하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시내 광야를 지나간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유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야기다.

 

모세의 광야이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분간하는 법을 훈련받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배웠다. 광야체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사는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예수님의 광야 이야기에서, 우리 주님은 종교와 영성,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간하는 법을 배우셨고, 그것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협력자, 충고자, 좋은 친구를 넘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준비를 갖추셨다.

 

다윗의 광야 이야기에서, 우리는 미움받고 한 사람의 인간이기를 거부당하고 한 마리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젊은이가 신성 모독의 삶과 기도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결국 기도를 택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기도를 선택하면서 거룩을 연습하는 삶을 시작했다.

 

거룩한’, ‘거룩’ 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늘나라에서 온 것처럼 착한혹은 나 같은 사람과 사귀기에는 너무 선한’ 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거룩이라는 이 단어는 광야생활이 다윗 안에 강렬하게 형성시켜 놓은 바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없다. (다윗=거룩)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인간다워져 갔다. 그리고 더욱더 다윗다워져 갔다. 거룩한은 바로 그러한 삶,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점점 더 살아 있는 인간으로 깨어나는 삶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 광야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것들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한다. 이 대면은 시험과 유혹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4. 동굴 속의 사울 왕

다윗의 광야생활 중에 엔게디 근처의 광야 동굴에서 다윗과 사울이 만난 이야기가 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젊은이 몇 사람이 사해의 절벽에 나 있는 어느 동굴 속에 숨어 있다. 날이 무척 더웠기 때문에 동굴 속 깊은 곳에서 쉬고 있었다. 쉬고 있을 때 추적을 하고 있던 사울 왕에게 들켜 몹시 놀란다. 추적당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추적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막 태양의 빛에 눈은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의 눈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울은 동굴에 대변을 보러 들어왔었다.

 

그때 다윗과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은 상황을 파악한다. 그들을 보지 못하고 뒤로 돌아 뒷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사울은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었지만 다윗은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뒤로 가서 옷자락의 일부를 잘라내었다. 그 뒤 사울이 어느 정도 멀리 갔을 무렵 다윗이 임금님! 임금님!” 이라고 부르며 앞에 다가가서 절하고 사울에게 묻는다. 옷자락을 보여주며 왜 임금님은 제가 당신의 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바로 임금님의 옷자락입니다.” 라며 여호와의 기름 부 음 받은 자를 해하지 못한다고 말을 한다.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며 다윗의 거룩한 삶의 면모를 볼 수 있다.

5.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다윗은 거룩을 발견함 동시에 피난처를 발견했다. 우리는 시편에서 반복해서 피난처라는 단어를 만난다. 시편 2주께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5내가 주께 피하였거늘광야는 다윗이 피난처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 사전이었다. 그가 거기서 발견한 피난처의 뜻은 주로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

 

피난처란 우리가 도망쳐가는 장소다. 그러나 시편에서 그 단어는 도망과 관련 된 모든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뜻을 잃고, 대신 오직 여호와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즉 인간이 단호하게 혹은 구체적인 위험과 유혹에 직면할 때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보다도 위에 계신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 피난처라는 단어는 다윗의 기도문에서 좋은 경험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를 그 피난처로 이끈 것은 나쁜 경험 이었다. 처음에는 목숨을 부지하고자 달려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하나님이라는 생명을 발견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이십니다”

 

우리는 처음에 무엇을 느끼고 행하고 생각하든지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는 길이 될 수 있다. 직통이 아니면 돌아서라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의 출발선은 피부에 가장 와닿는 일들이다.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 말 안 듣는 차, 까다로운 배우자, 고집 센 아이 등 우리는 엔게디 광야에서 살고자 바동거리며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하나님의 광야에서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엔게디 광야는 다윗에게 피난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도의 훈련의 장소였다. 과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앞두시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셨던 것처럼 다윗에겐 광야는 믿음의 대장부로 훈련받는 시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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