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윗과 아비가일
우리는 다윗의 삶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놀라운 타이밍에 귀한 만남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이렇게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아이콘(icon) - 헬라어로는 이미지라는 뜻이지만 영어에서는 영적인 의미(우리의 기도하는 삶 속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주는 이미지)가 덧붙여져 쓰인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지낼 때 좋은 일을 하나 행하였다. 당시 광야는 자연재해도 잦고 범죄 발생률도 많은 곳이었는데 여기서 다윗과 그를 따르는 동지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구조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활동을 하던 도중 나발이라는 부유한 목축업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무법자들과 도둑들에게 많은 해를 당하고 있었고, 이를 다윗이 적어도 한 계절 동안 보호해 주었다..
이후 양털을 깎는 시기(추수의 시기)가 되어 한 해 동안 기른 양모를 거두어들이고 잔치가 벌어졌다. 다윗은 나발에게 잔치 음식과 마실 것을 좀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나발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더해 다윗과 그의 동료들을 모욕하였다. 나발의 야비함이 다윗 속에 있던 야비함을 건드렸고, 다윗은 나발과 그에 속한 모든 남자를 죽이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이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광야에서 배운 아름다운 거룩을 잃어버렸다. 다윗은 또 다른 사울이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때 나발에게 향하는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나타났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를 알아채고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중간에서 다윗을 만나러 간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얼굴을 땅에 대었다. 또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받은 자로서(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잊지 말라며 당신은 여호와를 위해 싸워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였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증언하였고, '물매로 던지듯……. 던지시리이다.' 라는 부분에서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린 일을 기억해 낼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다윗은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다윗 앞에 무릎 꿇은 아비가일은 기도와 시를 통해 다윗에게 하나님을 상기시켰다. 단지 주변인일 뿐이었던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추함으로 빠져들어 가던 다윗을 구해내었고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했다.
아름다움은 어떤 것에 속해있던, 우리의 오감을 통해 우리를 그 속으로 끌어당긴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이 다시금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접촉하게 했고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을 통해 다윗은 자신 안에 있던 거룩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 자신이 하나님께 받았던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나발의 이름의 뜻은 '어리석은 자'라는 뜻인데 시편 14편에 나발에 대한 다윗의 최종 판단이 나타난다. 어리석은 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영성이 아니므로, 나발이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이 파악되었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진척시켜야 한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였다.
시작은 열정과 희망이 넘치다가 어느 순간 타락하고 부패하여 탈선하는 일이 영성 생활에 자주 일어난다. 바울은 이런 경우를 난파라고 칭하였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난파당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무언가가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면 우리 속의 거만한 자아는 마음과 자아에 상처를 입었다며 보복하겠다고 벼른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어떠한 아름다움, 아름다운 것을 만난다. (바로 아비가일이다.) 이는 우리에게 현재 감정과 행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준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과 현재의 감정과 행동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자기에 싸여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발(어리석은 자)은 기껏해야 우리 삶의 본문에 들어올 수 없는 각주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본질을 잊는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잊는다. 그러다가 말씀을 통해서,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내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는 말씀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망각의 상태에서 빨리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야비함이 나의 야비함으로 바뀌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다윗은 자신 또한 사울과 똑같은 존재가 될 뻔한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잃으면 우리는 주변의 것들로 쉽게 흔들린다. 그럴 때 나를 제자리에 서게 해 줄 아비가일이 필요하다. 나에게 그런 아비가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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