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성경과 신학

다윗과 사무엘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3. 12. 1.
반응형

1. 다윗과 사무엘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사무엘이 찾아온다고 하자 불안했다. 왜냐하면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온다는 것은 무슨 큰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사무엘은 흥겨운 예배를 인도하고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 앞에서 축제를 벌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밝혔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사무엘이 그 마을을 방문한 데는 마을사람 전체를 모아 예배 축제를 벌이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사무엘은 이새라는 이름의 그 마을 농부와 여덟 명의 아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이새와 그의 아들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 사무엘은 그들 각자를 차례대로 면담하며 자세히 살폈다. 장남 엘리압, 그리고 차남 아비나답, 삼남 시므이라고도 하는 삼마 그리고 일곱 번째 아들까지 사무엘은 살펴보았는데 모두 불합격이었다. 사무엘은 몹시 당황했다. 혹시 하나님의 메시지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예언자로서의 영력이 다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고 또 지금은 온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듯이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바로 다윗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막내 히브리어로 하카돈’- 이라고 불렀다. 막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삼상16:11). 만일 당신이 여덟 형제 중 막내라면 집에서 어린애 이상으로 대우받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하카돈이라는 단어는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말로서, 중요한 자리에는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다윗은 선택되었다. 선택되고 기름부음을 받았다. 사람의 안목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나 형제, 심지어 사무엘의 안목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안목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는 그렇게 선택되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나중에 그 날을 회상할 때, 그들은 어떤 중요한 일을 맡기는 자리에서 이새의 멋진 아들들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과, 또 늘 그랬듯이 다윗이 늦게야 거기에 나타났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들은 금세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유진 피터슨) 잊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다윗이 되었다. 나는 항상 다윗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언가 다윗과 같은 면이 있음을 - 비록 보잘것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성경 이야기꾼의 의도요 기술이다.

 

2. 평범한 사람

 

다윗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흔히 깔보며 낮추어 부르는 말로 단순한평신도에 불과했다. 아버지도 사무엘에게 그를 빠뜨리고 소개했고, 형제들에게도 그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게다가 그의 족보를 조사해 보면 좋지 않은 피가 섞여 있는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증오와 멸시를 받았던 모압 족속의()의 피가 섞여 있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꼬마 목동이었던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기름부음 받아,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와 전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분명, 모든 평범한 남녀, 이름 없는 서민들, 별 볼일 없는 이들, 변변치 못한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사람들 다시 말해, 이 오래된 행성 지구 위에 살았던 사람들 대다수 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뽑히는 것은 일반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입증된 능력이나 유망한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간에 대한 성경의 중심 이야기가 평신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윗은 제사장으로 임명받지 않았다. 그는 흔히 하는 말로, ‘사역으로부름 받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평신도, ‘하카돈에 불과했다.

 

다윗의 삶은 성경에서 흔히 말하는 만인제사장주의의 최고의 예시였다. 종교개혁 때 루터는 만인제사장주의를 열심히 주창했지만, 이것은 그가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었다. 교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일반 평신도였다.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작은 사람들이 단순한 추종자나 소비자로 무시되거나 외면당하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비참한 삶으로부터 구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윗의 조상들은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선언적 말씀을 들었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19:6) 이 말씀을 처음 듣는 순간, 그들은 분명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놀라움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그러한 정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이집트에서는 몇몇 제사장이 나일 강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사원에 살면서 모든 권력을 쥐고 종교 의식을 지배하며 나라의 업무를 관장했다. 그러한 제사장 앞에서 일개 평신도는 형편없는 초라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이런 말씀이 들린 것이었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광야에 있는 그들의 성전이라야 간이 텐트 정도였고,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광야 생활에서 조잡한 평등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제사장을 두라는 말씀이 아니라 제사장이 되라는 말씀을 들었다. 예복도, 성전도, 성직 훈련도, 위계질서도 없는 제사장 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같은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을 때 그들은 다른 정체성들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제사장 정체성을 부여 받았다.(벧전2:5,9, 1:6, 5:10, 20:6)

 

그렇다면 도대체 제사장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 인간의 소원을 말씀드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점에서든, 아니 모든 점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제사장이란 바로 그러한 실재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너무 쉽게 마음이 떠나가기에, 하나님을 기억나게 해주고 우리 앞에 하나님을 들이미는 역할을 해주는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것도 많은 수의 제사장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에 두신 것이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제사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제사장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평생 동안 주변 사람들은 그의 삶과 일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다스림과 은혜와 자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들이며 그들 안에는 스스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처럼 스스로 낮추어 보는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일까? 분명 성경이나 복음으로부터는 아니다. 그들은 바로 문화 세속 문화든, 교회 문화든 에서 그러한 자기 이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유진 피터슨)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수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과 더불어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전문가 일반인 구분을 철폐하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이를 이루는 데 있어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능동적이고 기도하는 상상력을 가지고 다윗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 때 모든 신앙 문제에서 평신도의 중요성과 중심성에 다시 눈 뜰 수 있게 되었다.

3. 이름

 

다윗의 선택과 기름부음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다윗이라는 이름은 끝에 가서야 비로소 제시된다(13). 그로 인해 그 이름은 특별히 부각된다. 다윗이라는 이름이 이제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이름은 구약성경에서 600번 이상, 신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다.

 

개인의 이름은, 발아해서 장차 개인적인 이야기로 자라나는 씨앗과 같다. 하나님은 개인과 관계를 맺으신다. 즉 하나님은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개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 결코 일련번호나 추상적 개념이나 목표나 계획과 관계를 맺으시지 않는다. 이름 짓기와 이름 부르기는 언어가 최고로 순수하게 사용되는 형태다. 다윗을 최초로 소개하는 이 야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나 지위에 대한 언급이 아닌, 바로 그의 이름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 무시당하고 초대받지 못한 인물이었던 한 목동이 예언자와 성령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마침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다윗이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728x90
반응형

'4. 성경과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과 골리앗  (0) 2023.12.04
다윗과 사울  (0) 2023.12.02
다윗 이야기  (0) 2023.11.30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정리  (0) 2023.11.21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0) 202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