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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과 신학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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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소개

오늘날 많은 신앙인 중에는 자신이 교회 다니는 것을 숨기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더러는 가나안 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나안 교인이라는 말은 하나의 정형화된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 단어를 거꾸로 말하면 그 의미에 답을 찾을 수 있다. 가나안을 거꾸로 말하면 안 나가이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에 실망했고 다닐만한 교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이 이런 자들에게 답을 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는 필립 얀시이다. 필립 얀시는 최고의 평신도 기독교 작가 중 한 사람이고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미국 ECPA선정 올해 최고의 책을 수상했으며 그가 낸 9개의 책 모두 골드메달을 수상하는 공전의 저술업적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이다.

 

이런 필립 얀시도 한 때는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교회를 떠났던 아픈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과 그 해결을 통해 만들어진 책이다.

 

나는 이런 고민이 필립 얀시와 가나안 교인뿐만 아니라, 말은 하지는 못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해결하고 난 후 지은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 답을 찾아가 보자.

 

먼저 필립 얀시가 말하는 교회를 등지게 했던 2가지 이유가 있었다. 필립 얀시는 미국 조지아 주의 근본주의적인 색채가 깊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교회를 등지게 만드는 장벽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째는 교인들의 위선이었다. 교인들의 위선이라 이는 율법적인 교회에서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교회에서 잘 지켜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이런 위선적인 모습들이 무엇인지는 우리 기억 속에 다 잠재해 있으리라 본다.

 

둘째는 문화적인 문제였다고 한다.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의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본질은 변하면 안 되지만 그 본질을 지키는 방법은 시대와 환경과 문화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그런 모습들을 교회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런 고민 가운데 필립 얀시는 한동안 교회를 떠났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계속해서 교회를 떠나지 않고 돌아왔다. 이 책에는 그 이유가 나오는데 역시나 2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기독교는 철학이나 내향성만 추구하는 종교가 아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공동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는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잠시 교회를 떠난 적은 있었지만 언제나 고통받는 쪽은 자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동안 교회를 떠나 홀로 편력하던 시절 자신은 언제나 안으로 퇴행했고 공동체라는 더 큰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둘째는 교회에서 과연 무엇을 찾아야 할지 오랜 세월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보는 방식이 포함된다고 하는데, 이 전망의 방식이 우리 모두에게 교회의 본령, 곧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리라고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는 방법을 4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2.  위를 보고

 

필립 얀시는 예전의 자기를 말하자면 꽤 똑똑한 체하는 소비자의 태도로 교회를 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일러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극장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극장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주연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눈에 띄지 않는 무대 좌우편에서 배우들에게 은밀히 이것저것 일러주는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는 회중들의 마음에서 발생한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성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 예배의 핵심에 분명한 강조점을 둔다.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라고 월터 윙크는 말한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것이다.

 

3.  주위를 보고

 

필립 얀시는 러셀 스트리트 교회에서 위뿐 아니라 주위 또한 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는 현격하게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예배했다고 한다. 주일 아침이면 자원봉사들이 무료로 배식한 밥을 먹고 노숙자들은 아침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의자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교회 회중에는 또한 시카고 대학이나 노스웨스튼 대학 같은 유명한 학교의 철학박사 과정 대학원생이나, 의사, 변호사, 기타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학력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천만 원씩 버는 고학력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든 일자무식의 노숙자들에게든 복음은 동일했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는 이 교횔 다니면서부터 교회를,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는 장소로 희구(喜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 토대, 곧 하나님의 화목게 하시는 사랑은 세상의 모든 민족, 인종, 계급, 나이, 성을 초월한다. 공동체가 먼저다. 우리를 갈라놓는 갈등과 문제는 나중이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일치를 추구하되 획일이 아니며, 다양성을 추구하되 분열이 아닌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남자와 여자를, 노예와 자유인을 예수의 발 앞에 동등하게 불러 모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가?

 

4. 밖을 보고

 

필립 얀시는 시카고 러셀 교회에서 많은 깨달을 얻게 되는데 그는, 교회의 선교란 바로 내 이웃의 절박함에 손 내미는 것임을 배웠다고 한다. 그토록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별다른 분규가 없었던 이유 하나를 대보라면, “날마다 우리와 같은 거리를 오가는 지역공동체 사람들에게 다가 서고자 교회 회중 전체가 한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갈등이란 아무래도 나를 먼저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타인을 섬기려는 마음이 분주하면 나 자신은 그만큼 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지 않는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사랑, 그것이 믿음의 역설이다.

 

5. 안을 보다

 

러셀 교회의 빌 레슬리 목사는 끊임없이 은혜를 외쳤다고 한다. 매주 은혜를 주제로 설교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만치 구체적으로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필립 얀시는 은혜란 내 유년 시절의 근본주의적인 교회에서는 도무지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나의 옛 교회는 왜 그렇게 무섭기만 했을까? 우리의 교회가, 경쟁과 비난과 서열, 곧 은혜 아닌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 은혜를 알릴 수는 없을까?” 이제 그는 교회를 찾으면, 안을 보며 하나님께 부탁한다고 한다. 자신에게서 싸늘한 비평과 경쟁의 독을 제거하시고, 대신 은혜를 채워달라고, 어느 모로 보나 은혜가 넘쳐나는 교회로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될 것을 이야기하며 그 표상으로 러셀 스트리트 교회의 침례식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러셀 교회는 침례교이기 때문에 미시건 호수에서 침례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시카고의 백사장에는 그들 나름의 사회적 서열이 있다고 한다. 남미 계통 사람들은 백사장 북쪽에, 전문직의 젊은 부자들은 구조대 망루 주변에, 동성연애자들은 바위지대에 각각 몰려든다고 한다. 끼리끼리 모이고, 가족끼리 붙어 앉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침례를 받기 위해 모인 작은 공동체에는 주식 중개인과 쿠바인과 오페라 가수와 여든다섯 먹은 흑인 노예의 손녀딸이 있었다고 한다. 즉 모두가 한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필립 얀시는 교회를 정의할 때 칼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교회는. 세상의 방식과는 현격히 다른 새로운 표상,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전혀 모순되는 표상을 세우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이다. 미시건 호수 백사장에서 거행한 러셀 교회의 예식은 정녕 세상의 방식, 적어도 시카고의 방식과는 현격히 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보건대, 특별히 러셀 스트리트 교회는,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교회가 세상과 모순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필립 얀시는 이러한 교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진술을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데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인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구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에 대해서 정의할 때 말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필립 얀시의 표현대로 말하면 바울은 망설이고 유예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적합한 말을 찾아 들어간다고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고전 3:9) , 한편으로 생각하니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다.(고전 3:9) 확실히 그 말이 더 옳겠다. 그러나 더 좋은 비유가 있다. 너희는 성전이다.(고전 3:16) 사도 바울은 아직도 망설이고 유예한다. 내내 같은 어조를 유지하며 나아가다 12장에 이르러, 마침내 최상의 비유 하나를 건져 올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27) 그리고 그 시점에서 책 전체의 어조는 순식간에 바뀐다. 이것저것 꾸짖고 당부하는 개인 서신의 문체에서 하나의 유려한 산문 문체로의 비상한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다.”

 

6. 책을 읽고

그렇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능력을 행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돕는 자로, 어떤 사람은 다스리는 자로,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자로 주님께서 세우셨다. 주님은 이런 모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은사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곧 교회는 하나님께 은혜받은 공동체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이로 인해 가나안 교회 즉 교회 다니지 않고 혼자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불완전한 우리를 믿음의 성도로 부르시고 세우셨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새들백 교회 이야기를 지은 릭 워렌 목사는 교회의 5 목적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예배)

둘째.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사역-섬김)

셋째. 가서 제자 삼으라(전도)

넷째. 세례를 주라(교제)

다섯째. 지키도록 가르치라(제자훈련)

 

릭 워렌 목사는 새들백 교회의 목적 진술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의 가족에 소속하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숙에 이르도록 계발하고 그들을 교회에서 사역하고, 세상에서 선교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하지 말고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키우는 일에 주력한다.”

 

,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고 그 몸의 지체인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고 훈련받고 섬기며 복음을 증거 하는 공동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남자와 여자를, 노예와 자유인을 예수의 발 앞에 동등하게 불러 모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본질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필립 얀시의 말대로

위를 보자.

주위를 보자.

밖을 보자.

그리고 안을 보자.

 

그리하여 참된 교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나는 필립 얀시의 이 글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적인 특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홀로 신앙 생활하는 가나안 교인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교회 나가기를 꺼려하는 완벽한 교회를 찾아 고민하는 가나안 교인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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