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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과 신학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사무엘하 2~4장)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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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을 통해 권력과 신앙의 충돌, 다윗 왕의 군사적 동맹과 내적 갈등을 탐구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 인간의 역할을 짚어본다.

글 내용
1. 새로운 상황
2.  아브넬과 요압
3. 어리석은 자들
4.  스루야의 아들들
결론

 

스루야의아들들-요압-아비새-아사헬
스루야의 아들들:요압,아비새,아사헬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됐다. 이젠 그에게 최고의 시절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유감스럽게도, 그간 동지라고 믿었던 이들 때문에 오히려 비참해진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다윗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다윗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스루야의 아들들이다. 스루야는 다윗의 여동생이고 아들이 셋이 있었다. 요압, 아비새, 아사헬이 바로 그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본다면, 그 안에 스루야의 아들들이 없는 장소나 모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이래로 좋은 소식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스루야의 아들들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이 아무리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의 신앙을 파괴할 수 없다.


1. 새로운 상황

새로운 상황이 도래했다. 사울이 죽었고 요나단도 죽었다. 다윗은 이들의 죽음을 숭고하게 애도했다. 이렇게 비탄하는 다윗은 가장 다윗다운 다윗이다. 믿고 경외하며, 관대하고 열정 어린 다윗, 또 그는 이제 왕이다. 오래 전 사무엘에게서 받은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이 이제 공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10여 년 동안 광야에서 쫓기며 산 후 이제 다윗은 힘을 가진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여전히 광야에서 배운 경외와 자비와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알아서 행동해야 할 것인가?


2.  아브넬과 요압

이 지점에서 조연들의 이야기가 성경 전면에 드러난다. 북쪽 사울 궁정의 아브넬과 남쪽 다윗 궁정의 요압이 바로 그들이다.

 

히브리 민족은 12지파마다 강한 독자적 정체성을 가졌는데, 보통 그것이 히브리인으로서의 집합적 정체성보다 더 우선했다. 강력한 외부 민족의 침략이 있을 시에는 지파적 차이를 접어두고 히브리인으로서 단결했지만,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는 곧 지파적 정체성으로 돌아가곤 했다.

 

북쪽에 위치한 열한 지파는 때때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고, 유달리 개별적 정체성이 강했던 남쪽의 유다는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사울 당시 강력한 블레셋의 위협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의 연맹으로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이 추방당하자 그의 고향 지파 유다는, 비록 연맹에서 탈퇴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다윗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사울과 요나단이 죽자 유다 지파는 즉시 다윗을 유다의 중심 도시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유일한 후계자인 40대의 이스보셋에 의해 존속된 왕실을 중심으로 명목적으로나마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강력한 지도자가 못 되었고, 이는 그 동안 이름 없는 인물이었던 무뢰한들이 앞으로 나서서 설치는 기회가 되었다. 아브넬과 요압은 이제 음지에서 나와, 비록 잠시지만 이야기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의 사령관이었으며, 요압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이었다.

아브넬은 극도의 기회주의자다. 그는 국광 옹립자로서 위치를 확립하여 힘없는 이스보셋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면서, 미래는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북쪽 지파들을 다윗 쪽으로 회유하기 시작한다. 이는 오로지 새로운 정부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브넬은 자신의 책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며 이스보셋을 협박한다. “주께서는 이미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다윗 편을 들어서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셔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삼으셔서,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삼하3:9-10)

 

그는 마찬가지로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구슬린다. 주께서 이미 다윗을 두고 내가 나의 종 다윗을 시켜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지배와 모든 원수의 지배에서 구해내겠다하고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삼하3:18)

 

아브넬은 아주 세련되게 교활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우해 하나님의 이름을 교묘히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반면 요압은 전형적인 억세고 거친 사람이다. 그는 일단 죽이고 나서 나중에 생각한다. 또한 그는 소위 이상주의자다. 즉 가신이 보기에 옳은 이상 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을 위해서라면 앞 뒤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상주의는 사실상 이런 태도다. “당신이 내 이상에 반대할 경우 나는 이상을 위해 당신을 제거해 버릴 수 있소. 정당한 방법이건 비열한 방법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브넬과 요압은 각기 군대를 이끌고 기브온 연못에서 만난다. 아브넬은 연못 이쪽에, 요압은 연못 저쪽에 진을 친다. 그들은 각기 열두 명의 군사를 앞으로 보내 일종의 무예 경연 대회를 벌이기로 한다. 신호가 울리자 양쪽 군사들이 달려 나간다. 그러나 원래는 승패를 거리기 위한 시합이었던 것이 곧 서로 죽고 죽이는 난잡한 싸움이 되어 버린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이 스물네 명 모두 죽고 만다. 시합으로 시작했던 것이 광란과 학살로 끝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펴보던 양편 군대가 모두 관람석을 박차고 경기장으로 나와 적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광란이 벌어졌다. 그 날 전사자 수는 이스라엘 쪽에서 360, 유다 쪽에서 20명이었다.

 

이날 싸움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었고 어떠한 영적 고민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커다란 허영심과, 군력과 지위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아브넬과 요압. 요압과 아브넬. 이 폭력의 와중에서 아브넬은 요압을 향해 큰 소리를 외쳤다. “언제까지 피를 보아야 하겠느냐? 이러다가는 마침내 끔찍한 일이 일어날 줄을 모르느냐?”(삼하2:26 공동번역) 그러나 답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각주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왕업을 행하고 있는 다윗을 발견한다. 다윗은 관대하게 대하며(길르앗 야베스에서, 삼하2:5-7), 가족을 부양하며(삼하3:2-5), 언약을 맺으며(삼하3:12-16), 시를 쓰며 진실하게 슬퍼하고(삼하3:31-37) 있었다.

 

그러나 아브넬과 요압은 이를 방해하고 훼방하고 망치기만 할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진리와 참다운 영예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 저급하고 좀스러우며 거만한 전략가들은 역사적 상황을(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명성과 야망을 위한 무대로 이용하는 데 몰두한다. 아브넬은 잔꾀를 통해서, 요압은 폭력을 통해서...


3. 어리석은 자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여러 장에 걸쳐 읽다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에 왜 자꾸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아브넬이나 요압 같은 얼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읽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런 것이라면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이미 충분히 보고 듣고 있다. 그래서 성경도 편집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것일까?

 

쉽게 마음에 차지는 않겠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로 하신 것이다.


우리가 신앙과 제자도의 길을 걷는 중에 우리는 멋진 친구들, 은혜와 아름다움, 충성과 기도의 사람들을 만난다. 바로 요나단과 아비가일, 사무엘과 아히멜렉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또한 그 길에서 우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브넬과 요압을 만나기도 한다.

 

단어의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요압과 아브넬은 다윗의 원수는 아니다. 한쪽을 택해야 할 경우 둘 다 다윗 편에 설 자들이다. 아브넬은 사울의 왕국을 다윗 쪽으로 넘기기 위해 신중하게 외교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요압은 방해물로 판단되는 것을 나름대로 가장 신속하게 가장 효과적으로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다윗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다윗이 자신들의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저들에게 종교는 야망을 가리는 가면일 뿐이다. 저들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찬양하는 순종 안에서 순조롭고 느긋하게 사는 것을 너무나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골리앗, 도엑, 블레셋인들과 아말렉 인들은 명백한 원수들이다. 그러나 아브넬과 요압은 어떤가? 그들이 스스로 우리 편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 역시 그들을 우리 편이라고 가정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가정을 승인하지 않는다. 아브넬과 요압은 자세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어떤 방법으로 일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이기적 이용(아브넬)이나 폭력(요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4.  스루야의 아들들

스루야는 다윗의 여동생이고 아들이 셋 있었다. 요압, 아비새, 아사헬이 바로 그들이다. 기브온 연못에서 아브넬은 아사헬을 어쩔 수 없이(아브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사헬은 끝까지 아브넬을 추격했다.) 죽였다. 그래서 수년 뒤 요압은 외교상의 문제를 의논하자며 아브넬을 속인 다음 아비새와 합작하여 그를 잔인하게 죽였다.

 

이후 스루야의 두 아들 요압과 아비새는 다윗에게 가시 같은 존재로 이야기의 끝까지 등장하고 있다.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살해하자 다윗은 목 놓아 울며 말했다.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더 강하니, 비록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약하오.”(삼하3:39) 스루야의 두 아들은 뛰어난 전사였고 정치적으로는 다윗에게 몸을 바쳐 충성했다. 그러나 요압과 아비새는 다윗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평화 그리고 평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복과 힘과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향한 다윗의 노력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러나 스루야의 아들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다. 만일 이것이 세속의 이야기였다면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그다지 뜻밖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야기다. 그리고 성경은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장에서 그런 뜻밖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접하는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 비열함과 기회주의와 종교적 폭력과 종교적 선전 조작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를 너무도 힘들게 만드는 많고 많은 스루야의 아들들의 세계에서 말이다.


 

결론

다윗의 시대에 스루야의 아들들은 복잡한 도전을 제시했다. 그들의 행동은 때로 다윗을 지원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정한 충성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길에는 도움과 장애물이 공존하며, 하나님의 뜻이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진정한 구원은 이기적 목적을 넘어선,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찾을 수 있다.

 

2023.11.30 - [4. 성경과 신학] - 다윗 이야기

 

다윗 이야기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무엇보다도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거대하고 거룩한 문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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