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 정보 알림

꼬꼬무 그가 전설이 된 이유 -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by 우리모두함께 행복해요. 2024. 6. 12.
반응형

 
 
꼬꼬무 6월 13일에는 아시아 수영계의 전설 조오련 선수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적인 수영 스타로, 탁월한 실력과 열정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수영 기술과 인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1. 생애

조오련씨의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2년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10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났으며, 1968년 10월 해남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하여 서울에서 간판가게에 취직했습니다.
 


우연히 YMCA 수영장을 발견하고 1968년 11월 등록, 열심히 수영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1969년 전국체육대회 서울 예선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1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75년 산업은행에 입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영선수로 복귀했고,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접영 200m 동메달로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열정을 잃지 않아 대한해협 횡단, 한강 종주 등 장거리 수영 도전을 지속했습니다. 1989년 수영교실, 1993년 스포츠센터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2001년 아내 사망 후 큰 충격을 받았지만, 2009년 재혼하며 대한해협 2차 횡단을 준비하다가 당해 8월 4일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2021년 국가보훈처 국립묘지 안장대상 심의위원회에서 '국가사회공헌자'로 인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2. 수상 실적

 
조오련 선수는 1970년대 한국 수영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스포츠 영웅으로, 2020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의 헌액식에는 30년 지기 동갑내기 친구가 대리 수상자로 나섰습니다.
 


1) 조오련 선수의 주요 수상 실적
 

그림자료: 나무위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 1500m 2관왕 달성 
 

1970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400m와 1500m자유형에서 아시아신기록을 세워 금메달을 딴 고 조오련 선수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자유형 200m(은), 400m(금), 1500m(금) 3관왕 달성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 1500m를 2개 대회 연속 우승하고 조오련(가운데)은 시상식에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두르고 나왔다.   사진=연합뉴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조오련 수영선수의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기념 카퍼레이드 장면. 국가기록원 제공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  접영 200m 동메달
 


2) 조오련 선수의 업적 및 영향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1970년대 한국 수영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이후 박태환 선수 등 한국 수영 스타들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 헌액식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대한민국 체육 100년 기념식'. 2부에서 열린 2020 스포츠영웅 헌액식에 고 조오련의 대리수상자로 나선 절친 곽경호 씨. © 뉴스1

 
조오련 씨의 헌액식에는 30년 지기 동갑내기 친구인 곽경호씨가 대리 수상자로 나섰습니다. 곽경호 씨는 1982년 도버해협 횡단 시 동행했던 인물로 2009년 고 조오련씨의 장례식을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종합적으로 조오련 씨는 1970년대 한국 수영 발전을 이끌었던 스포츠 영웅이며, 그의 업적과 인품은 후대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그의 업적과 영향력을 인정받아 2020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3. 은퇴 이후 삶과 도전

 
1) 학업과 수영 열정 이어가기
197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편입하여 1981년 졸업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수영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 1980년 48km 대한해협을 13시간 16분만에 횡단했습니다.
1982년에는 34km 영국 도버 해협을 9시간 35분만에 횡단하는 등 수영 도전을 계속했습니다.
 


2) 수영 교육 및 행정 활동
1989년 '조오련 수영교실'을,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1998년부터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지만,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 지속적인 도전과 업적
1980년 48Km의 대한해협을 13시간 16분에 횡단했습니다.

 

 
1982년 34Km의 영국 도버 해협을 9시간 35분 만에 횡단했습니다.
2002년 다시 한 번 대한해협을 횡단했고, 2003년 한강 700리 종주에 성공했습니다.
2005년 광복 60주년에는 가족과 함께 울릉도-독도 93km를 18시간만에 횡단했습니다.

 
2008년에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의미로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했습니다.
 

 


4. 그가 세운 업적들

 
1) 수영 경기 업적
1970년과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선수 시절 한국 신기록을 50차례나 수립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2) 수영 도전 업적
1980년 48km 대한해협을 13시간 16분만에 횡단했습니다. 
1982년 34km 영국 도버 해협을 9시간 35분만에 횡단했습니다. 
2002년 다시 한 번 대한해협을 횡단했고, 2003년 한강 700리 종주에 성공했습니다. 
2005년 광복 60주년에 가족과 함께 울릉도-독도 93km를 18시간만에 횡단했습니다. 
2008년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의미로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했습니다.


3) 수영 교육 및 행정 활동
1989년 '조오련 수영교실'을,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1998년부터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지만,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조오련 선수는 수영 선수 시절부터 한국 신기록을 다수 수립하며 명성을 쌓았습니다. 은퇴 후에도 대한해협, 도버 해협, 한강 종주 등 다양한 수영 도전을 이어갔고, 수영 교실과 스포츠 센터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이처럼 그는 수영 선수에서 교육자, 행정가로 활약하며 평생 수영에 헌신했습니다.
 

 


4) 아쉬운 별세와 국립묘지 안장
2001년 아내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아 수영교실 사업을 접었습니다.
2009년 8월 4일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2021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조오련 선수는 은퇴 후에도 수영 도전과 교육, 행정 활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대한해협 횡단과 같은 도전적인 수영 기록을 계속 세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09년 갑작스러운 별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공헌과 업적은 국립묘지 안장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결론

조오련 선수의 삶은 아시아 수영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열정과 노력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났고,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업적과 삶은 우리 모두에게 꿈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수영전설 #조오련 #수영 #아시안게임금메달리스트 #아시아체육계 #스포츠영웅 #수영역사 #수영인생 #인생의교훈 #영감 #꿈을이루는방법 #아시아스포츠스타 #아시아체육인 #수영기술 #수영천재 #수영천재조오련 #아시아수영역사 #아시아수영영웅 #아시아수영전설의삶 #아시아수영스타 #아시아스포츠영웅 #아시아스포츠스타

728x90
반응형